'영웅'이라는 이름이 지닌 역사의 무게, 더 묵직하고 뜨겁게 [리뷰]

입력 2023-02-01 08:00  


1909년 러시아 연해주. 자작나무 숲의 한 가운데에 선 사내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우리들의 외침, 세상이 들으리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결의에 찬 이들의 목소리는 숲의 서늘한 기운을 금세 숨 막히는 뜨거움으로 바꾸었다.

이날 안중근과 독립투사 동지 11인은 네 번째 손가락을 잘랐다. 태극기 앞에서 다짐한 피의 맹세는 단단하고 맹렬했다. 뮤지컬 '영웅'의 첫 장면이다. 시작부터 가슴 저릿한 단지(斷指)동맹으로 관객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영웅'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준비해 실행에 옮긴 뒤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야기를 그린다. 에이콤이 만든 창작 뮤지컬로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작품으로 14년간 많은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 뮤지컬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영웅'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오랜 시간 꾸준히 명성을 이어온 수작 중 하나다.

서사는 올곧게 '그날'을 향해 달려간다. 안중근과 동료들이 중국의 만두가게에서 웃으며 쌓은 화음은 이내 총성에 올라탄다. 명성왕후 시해를 목격한 마지막 궁녀 설희는 게이샤로 위장해 독립군의 정보원 역할을 자처하고, 일본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져 오는 가운데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결심한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다.



연출과 디자인의 힘이 살아있는 '영웅'이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무대 세트에 감성적인 영상이 더해져 내내 긴장과 고요를 오간다. 특히 인상적인 건 일본 경찰과 독립군의 추격신, 계획에 실패한 설희의 괴로움을 싣고 달리는 기차신이다. 철제 구조물을 오르내리며 속도감 있게 표현한 추격 장면은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달리는 기차는 상당히 생동감 있게, 감성적으로 묘사돼 순간적인 몰입도를 높인다.

다소 아쉬운 부분은 인물 간의 관계성을 풀어내는 방식이다. 조력자인 중국인 왕웨이의 동생 링링이 안중근을 짝사랑하고, 그런 링링을 독립군 유동하가 짝사랑하는 설정에서 살짝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전체적인 전개를 크게 방해하지는 않는다. 곳곳에 배치한 유머 코드마저 마음 한 곳을 저릿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서사만으로 2막은 꽉 찬다. 초연부터 지금까지 아홉 시즌에 걸쳐 안중근을 연기한 정성화는 '영웅' 그 자체다. 극을 끌고 가는 힘이 마지막까지 활활 타오른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강단 있게 열거하고 '누가 죄인인가'라고 말하는 모습에선 위대함이, 거사를 앞둔 상황에서는 인간적인 고뇌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독립군의 기개와 비장함을 표현하는 게 핵심인 만큼, 앙상블의 역할도 중요한데 이에 대해선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군무, 합창 어느 것 하나 빈틈이 없다.

'영웅'은 LG아트센터가 마곡에서 새롭게 문을 연 후 처음으로 올리는 뮤지컬이다. 음향은 작품의 분위기에 제대로 빠질 수 있을 정도다. 다만 시야는 객석 1층 앞~중간 객석의 경우 단차에 문제가 있나 의심될 정도이니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공연은 오는 2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시그니처홀에서 계속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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